연탄불에 보글보글 끓던 빨간 국물
[한겨레] 신당동 떡볶이 골목 탄생시킨 마복림 할머니의 즉석떡볶이
지난해 12월13일 모든 뉴스는 91살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보도했다. 생전에 '며느리도 몰라'라며 고추장맛의 비법으로 광고에도 등장했던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큰 어른' 마복림 할머니였다. 마복림 할머니는 미슐랭 별점을 받은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도, 유명한 대학의 식품영양학 교수도, 요리사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미식예찬>(1825년. 브리야사바랭 지음) 같은 고전을 저술한 이도 아니다. 요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길거리 음식, 떡볶이의 참맛을 방방곡곡에 알린 이다. 할머니의 이름은 떡볶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궤적은 우리 떡볶이의 역사이기도 하다.
살림집에서 팔기 시작해
신당동은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몰려든 동네였다. 개천이 흐르고 누더기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무 팽이를 돌렸다. 모두가 가난했다. 마복림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3년 할머니는 좁은 살림집 앞에 좌판을 펼치고 빨간 고추장에 버무린 떡볶이를 팔았다.
1950년대 이전 우리 기록에는 빨간 떡볶이가 없다. 고추장을 이용한 붉은 떡볶이를 처음 개발한 이를 할머니로 보는 이유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 기록은 조선 후기에 펴낸 조리서 <시의전서>에 등장하는 것이 고작이다. 흔히 궁중떡볶이라고 알려진 음식이다. 쇠고기, 각종 나물, 떡 등을 간장에 조린 고급 떡볶이였다. 왕이나 양반들이 먹었다.
떡볶이는 재료를 꼼꼼히 따져 보면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 떡, 만두, 라면 사리, 채소 등. 하지만 맛은 집집마다 차이가 있다. 소스 때문이다. 소스는 떡볶이를 구별하는 디엔에이다.
마복림 할머니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만의 떡볶이 디엔에이를 만들었다. 할머니는 찾아온 손님을 데리고 중국집에 갔다가 가래떡을 실수로 자장면에 떨어뜨렸다. 까만 자장면 소스가 묻은 떡을 맛본 할머니는 '옳다구나' 했다. 맛이 좋았다. 자신의 떡볶이에 응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할머니는 연탄불에 냄비를 얹고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와 떡을 넣어 끓였다. 둘째 며느리 김선자씨의 증언에 따르면 물엿, 깨, 설탕 등도 들어갔다. 색은 빨갛지만 그다지 맵지 않고 달콤하면서 은근한 맛의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인근에 있는 성동고, 무학여고, 한양공고 학생들이 먼저 알아보고 모여들었다. 허름하기만 했던 신당동 골목은 떡볶이 가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서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쌀과 밀가루를 약 7 대 3으로 섞어 만든 떡도 사람의 혀를 잡아끌었다.
김선자씨는 그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76년 시집와서 어머니를 바로 도왔어요. 당시 어머니는 드럼통에 연탄불을 넣고 그 위에 냄비를 올리고 야채, 우리 어머니 소스, 떡 올려 즉석에서 끓여 주었어요. 손님들이 마주 앉아서 먹게 했어요. 어머니가 연구한 거죠. 마주 보니깐 더 맛있었어요." 냄비에 재료를 담아 직접 끓여 먹는 즉석떡볶이의 형태다.
신당동 떡볶이의 명성은 즉석떡볶이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석떡볶이가 생기면서 들어가는 부재료들도 다양해졌다. 라면 사리, 쫄면 사리, 달걀, 만두, 튀김 등. 70년대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늘어나는 부재료만큼 더 커졌다. 할머니의 빨간 떡볶이도 전국에 퍼져나갔다. 이때 어묵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양배추도 들어갔다. 떡볶이는 더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달리 간식거리도 없고 배고프고 고달팠던 시절, 가격이 싸고 푸짐했던 떡볶이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살림집으로 옮겨 팔기 시작했어요. 남학생들은 받지 않았어요. 여학생들 신발도 감추고 장난이 심하니깐." 가게가 넓어지고 나서야 남학생들도 들어올 수 있었다. 70년대 풍경이다. "하루 연탄불을 100장씩 피웠어요. 손님 없을 때 활활 안 타게 막아두죠. 손님 오면 막아둔 거 여는데 연탄가스 냄새가 확 나서 고생했어요." 할머니는 80년대 초 엘피지가 보급되자 연탄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연탄불보다 화력이 세고 관리가 편리했던 엘피지는 즉석떡볶이 유행에 한몫을 했다.
"80년대 말 도시가스 들어와서 더 편해졌어요. 화력이 더 세기 때문에 훨씬 좋죠." 1996년 마복림 할머니는 한 업체의 고추장 티브이 광고에 출연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광고 대사는 지금도 귀에 익숙하다.
유명세에 힘입어 사람들이 몰렸던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2000년대 들어서 확고하게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중국과 일본 관광객의 단골 관광코스다. 세월 따라 떡볶이 가격도 변했다. 1인분에 50원 하던 떡볶이는 400원, 1500원으로 이어지다가 근래는 2500원으로 안착했다.
김씨의 기억에 "어머니는 엄하면서 인정이 많은 여장부"였다. "많은 자식들을 다 키워냈죠. 웬만한 여자 같으면 못하죠. 어디 이름 날리기가 쉽나요. 아들이 군대 갔을 때는 군인들에게 더 푸짐하게 주셨어요." 맛에도 엄격했던 마복림 할머니는 손님들이 떡볶이를 남기고 가면 노심초사했다. 남은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이유를 찾았다. 할머니의 소스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서 10년 전만 해도 며느리들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새벽 1시에 일어나 홀로 만들었던 소스는 이제 며느리 3명의 손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비법 이제 며느리들 손으로
"요즘도 '어머니 돌아가신 거 신문에서 봤어요, 뉴스에서 봤어요' 말하는 손님들이 많아요." 유가족들은 고향이 전라도 광주인 마복림 할머니를 경기도 가평에 모셨다. 3년 전부터 입원 치료를 받던 마복림 할머니는 노환으로 기력이 떨어져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현재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는 3명의 며느리와 맏손자 박진호(33)씨가 운영한다. 3대로 이어졌다. 김선자씨의 딸, 박은순(35)씨도 곧 맛을 이을 예정이다. 막내아들 부부는 인근에 같은 이름의 떡볶이집을 내 독립했다.
자손들은 두꺼운 프라이팬에 '마복림' 이름을 새겼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찾은 샐러리맨들이 눈에 띈다. 넥타이를 어깨너머로 넘기고 호호 불며 포크질을 한다. 당면이 줄줄 따라 올라오고 쫄깃한 떡도 따라온다. 2012년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는 여전히 바쁘다.
'죠스 떡볶이', '아딸 떡볶이', 'BBQ 올리브 떡볶이' 등 떡볶이 프랜차이즈가 골목마다 늘어나고 있다.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처럼 자신만의 비법으로 승부하는 소박하고 정겨운 떡볶이집들이 조금씩 설 땅을 내주고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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